부모님 친구 중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으면 별의별 재미가 있다. 햅쌀을 주문했더니 쌀 포대와 함께 수북한 콩깍지 다발과 밭에서 갓 뽑은 커다란 무가 두 개 왔다.
항상 깍지가 벗겨진 매끄러운 콩만 보다가 덤불에 가까운 가지와 콩깍지와 흙과 마른 잎이 마구 뒤섞여 있는 콩 가족 무더기를 보니 생소하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가 보니 ‘엄마가 외출해 있는 동안 이거나 까고 있으면 엄마가 편하겠다’는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몹쓸 효심이 밀려 올라와 태어나 처음으로 콩깍지를 까보기 위해 자리를 잡아 앉는다. 내가 콩깍지를 까려고 앉으니 퍼져 있던 남편도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몹쓸 협동심이 밀려 올라왔는지 슬그머니 일어나 콩 손질을 위해 자리를 잡아 앉았고, 예나 지금이나 지역 내에서 폭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아빠도 옆에 장갑을 끼고 앉는다.
콩깍지를 까보니 조금 생소하게도 검은 얼룩이 박혀 있는 콩이 나온다. 바짝 말라 갈색을 띠는 콩깍지는 가운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파스락 갈라지면서 초록색 바탕에 검은색 반점이 찍힌 콩 알갱이가 나오는데, 아직 겉이 초록 딩딩하고 축축한 느낌이 드는 콩깍지는 찢다시피 갈라서 까면 연두색 바탕에 자주색 반점이 찍혀있는 듯한 콩 알갱이가 나온다. “이거 자주색인 것도 먹어도 돼?” 했더니 아빠는 그게 더 맛있는 거란다. 신뢰가 엄청 가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교차 검증도 어렵고 (귀찮고) 그냥 대충 믿어보기로 한다.
한 30분 앉아 어깨가 빠지도록 (평소 모습과 어울리게 밀려 올라오는 엄살) 열심히 콩을 까고 나니 콩이 정말 콩알만큼 나왔다. 3명이 둘러앉아 깐 건데 팔면 10,000원도 안 되는 양이다. 심지어 원물 제공자는 별도로 있으니 무조건 적자다. 역시 사 먹는 게 제일 싸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사 먹는 농산물에 들어간 다른 사람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모양새를 바탕으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우리나라 토종 선비콩인 것 같다. 밥을 지어보니 예쁜 초록색이나 자주색 색감은 사라지고 거무튀튀한 색만 남았다. 초록 딩딩한 완두콩도 밥솥만 들어갔다 하면 색이 죽탱이가 되어 나오더니 이 선비콩도 역시나 그러하다. 그래도 맛은 기가 막히다. 콩이 이렇게 맛있다니? 맛으로만 따지면 나에게는 서리태가 1순위인데 그 자리를 넘보는 정도의 맛이다. 콩이 기가 막히도록 맛있다니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참말 기가 막혀할 것이겠지만 어쨌든 콩이 기가 막히게 맛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30대 후반 2인 가구인 우리 집에는 예사롭지 않게 국산 서리태도 있고, 쥐눈이콩도 있고, 완두콩도 있고, 메주콩도 있고, 호랑이콩도 있고, 강낭콩도 있다. 돈 쓰는 것이 재미있고 뭐 이것저것 사 모으는 것도 재미있는 맥시멀 리스트의 삶에 걸맞게 다음에는 아마도 선비콩도 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