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영어 교과서 반복해서 읽기, 이상한 나라의 여학생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학교 영어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도대체 그런 짓은 왜 했느냐 물으신다면?

영어 시험공부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영어는 좋아했는데, 영어 시험은 싫었다. 영어 수업이 있는 날은 수학 수업이 있는 날과 달리 학교 가는 길이 즐거웠는데, 영어 시험은 싫었다. 영어 성적을 잘 받고 싶은데, 영어 시험은 싫었다. 영어 시험공부도 당연히 싫었다.

단어를 외우기도 싫고, 문법을 이해하기도 싫었다. 조동사도, 주격 보어도, 사역 동사도 신경쓰지 않고 싶었다. 그렇지만 영어는 좋았고, 영어 성적은 잘 받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교과서 반복 읽기였다. 어차피 학교 시험은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문제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책 읽는 건 좋아했으니 그냥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고, 줄줄 읽었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냥 얼추 익혀질 때까지 읽었다.

교과서를 여러 번 읽으면 문장이 통째로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문장 구조가 기억 속에 묶이게 된다. 영어 교과서 문장을 읽으니 단어도 문법도 문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시험에서 문법적으로 정확히 이해를 하고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왠지 그냥 이게 맞을 것 같아서 답을 고르는 식이었는데, 대충 때려 맞추면 대충 맞았다.

중요한 내용들만 달달 외웠으면 더 효율적이었겠지만, 어쨌든 교과서 읽기의 효과는 있었고 시험은 잘 봤다. 그 이후의 삶을 돌이켜 보니 나라는 인간은 원래가 훨씬 효율적인 방법을 놔두고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길게 돌아가는 걸 자주 행하는 인간이었다. 어찌하리,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흥미로운 점은 비효율적인 영어 시험공부 방법이었던 학교 영어 교과서 읽기를 통해 영어 문장이 머릿속에 희미하게나마 차곡차곡 채워지면서, 훗날 영어 회화와 글쓰기에도 (직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