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 100번 보기, 영어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노팅힐 100번 넘게 보기를 해봤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대형서점에서 노팅힐 영화 대본 영어공부책을 샀다. 전체 대사는 아니고 일부가 발췌된 대본집과 함께 비디오테이프가 같이 있던 제품이었다. 비디오테이프라니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그걸 집에서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대학에 가서도 주말이나 방학 때 본가에 내려오면 또 봤다. 횟수를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10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노팅힐 100번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빠가 뭐라고 한다. 영화를 틀자마자 “너는 그걸 또 봐? 야, 너는 그걸 그렇게 많이 봐 놓고 지겹지도 않냐?”와 같은 성화를 들을 수 있게 된다. 100번 넘게 틀면 틀 때마다 들을 수도 있다. 횟수가 지날 때마다 ‘주말이라고 집에 내려와서 딱히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아 영화를 틀고 있는 저 딸내미를 향해 느끼는 뿌리 깊은 한심함’이 아빠의 목소리에 진하게 묻어난다. 엄마는 그냥 포기한 지 오래.

영어는? 노팅힐을 100번 넘게 본다고 영어가 딱히 늘지 않았다. 일단, 미국식 영어 교재 음성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렇다고 미국식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영국식 영어가 들리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휴 그랜트의 발음은 작게 웅얼거려서 알아듣기 어렵고 줄리아 로버츠의 발음은 빠르게 파르르 떨려서 알아듣기 어렵다.

기초적인 회화 실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보니 빠르게 흘러가는 대사는 그저 귀에 들리는 음악에 가깝다. 대본집을 같이 열심히 봤으면 조금이라도 더 늘었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냥 퍼져서 반쯤 멍한 상태로 영상에 빠져 있던 것뿐이다. 가상 런던 여행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어찌 주워 들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문장은 좀 있지만, 별 쓸모는 없었다. “Give it to me in yards.”를 어디에 쓴담?

한마디로 노팅힐 100번 보기 결과, 영어 실력 향상은 잘 모르겠고 그냥 “참 재미있었다.”

202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