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필기체 쓰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 줄 안, 두 칸 자리에 맞춰서 흐느적흐느적 필기체를 썼다. 아, 아니지. 흐느적흐느적 필기체를 그렸다.
오선지 악보가 아니라 삼선지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는 느낌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알파벳 단어도 헷갈릴까 말까 했던 시절, 기존의 알파벳과는 또 다른 생명체로 탄생한 필기체는 혼란의 영역이었다. m과 n 필기체는 그렇다 치겠는데, r이랑 s는 도대체 어째서?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아도 r과 s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도대체 필기체는 왜 쓴 걸까?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이게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던 게, 실제로 일을 하다가 외국인들이 메모를 하면서 설명을 할 때 필기체를 쓰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물론 필기체로 쓰면서 말로 설명을 했기 때문에 필기체 글씨를 읽지 않고 말로만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므로 결국 필기체 알파벳을 알아보는 일은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단은 하나도 쓸모가 없다. 버리기 아까워서 넣었다.)
편지를 쓰는 시대였다면 쓸모가 있었을까? 외국인이랑 주고받은 건 모두 이메일이었다. 아주 명료한 Arial 글꼴. 아니면 Times New Roman, 아니면 Verdana? Calibri? Tahoma? 필기체 같은 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교환학생 가서 들었던 중국어 수업 시간에 유럽 애들이 한자를 쓰는 광경을 보면서 영어 필기체 숙제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많이 힘겨워 보였지만 그 와중에 미술 시간 같은 즐거움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립시다, 이렇게 슥슥, 저렇게 슥슥. 참 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