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싹수가 노랬다. 어릴 때 파닉스 동요를 들으며 시작한 윤선생 교재에서 문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 정말 보기만 해도 싫었다. 그것이 나의 삶과 영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재빠르게 직감한 나는 윤선생 선생님과 협상을 시도했다.
“선생님 저 문법 공부하기 싫은데 그냥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오는 걸로 하는 건 어떨까요?”
선생님은 흠칫한 후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생각해 보니 그렇게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셨는지 (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아이가 학습지 자체를 때려치울 같다는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끼셨는지) 그러자고 하셨다. 그래서 그때부터 문장의 문법 같은 건 분석하지 않고 그냥 문장을 통째로 읽고 선생님과의 방문 수업 시간에 외워서 말하기를 했다.
그래봤자 기초 영어 수준이라 문장들이 짧았기 때문에 외우는 것 자체가 어렵진 않았던 것 같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까닭에 그 기간 동안의 기억 자체를 머릿속에서 통째로 삭제해 버렸을 가능성도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금방 잊히는 문장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입이 단련되었다. 문법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공부하지 않아도 문장 자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입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키는 딱히 커지지 않는데 머리는 커지고 학교 공부의 어려움이 커지는 동안 학교 수업 시간에 몰래 교과서 안에 소설책을 놓고 읽는 즐거움도 커지면서 윤선생도 내 인생에서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다. 윤선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생에서 사라지면서 통문장 외워 말하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어가 입에 붙는 느낌이 있었다. 실력이 확 늘었던 게 아니었지만 무언가 느는 것 같은 느낌 같은 걸 미세하게 감지할 수는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문장을 통째로 읽는 것의 힘을 의식적으로 깨달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이 나중에 학교 영어 시험공부를 할 때, 대학 영어 수업을 들을 때, 영어 업무 미팅을 할 때 계속 문장 읽기에 나를 끌어들이는 느낌이 있었다.
싹수가 아주 노랬던 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