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절대로 안 했나?

이 책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문법 공부에 질색하고 사실 모든 형태의 ‘공부’에 질색하는 사람에게 있어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책이면? 쫄랑쫄랑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다.

이 책을 테이프를 들으며 열심히 보았다. (테이프가 뭐냐고? 그런 게 있었던 시절이 있단다, 아가야.) 테이프를 계속 반복해서 듣고, 받아쓰기를 하고, 영영사전을 찾고, 영화를 골라 보고, 영자 신문을 보고 기타 등등 저자가 제시하는 영어 공부법은 많았지만, 그냥 이 책 자체의 문장만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요구사항이었다. 영어 ‘공부’ 하지 말라면서요? 이 책을 한참 붙들고 지낸 후에도 영어가 딱히 되는 느낌은 없었다. 더 잘 들리는 느낌도, 입이 트이는 느낌도 없었다. 소리 내서 읽지는 않았으니 입이 트였을 리가 없다. 아이고.

그렇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이 책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 사전을 봤던 것도 이 책 때문이었던 것 같고, 스크린 영어책이 포함된 노팅힐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봤던 것도 이 책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디오테이프는 또 뭐냐고? 그대의 엄마에게 물어보면 안다.) 그런 것들이 단기적으로, 직접적으로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속적인 노출은 가능하게 했다.

문법 같은 걸 신경 쓰지 않고 테이프를 들으면서 문장을 읽기를 몇 달 동안이나마 했던 것도 그 당시에는 효과를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영어 회화의 입이 트일 때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결국 영어 공부를 한 것인 게 되어버려서 속은 느낌도 들지만, 속았던 것이 결국은 나의 (티끌 같은) 자산이 되었다.

20240112